바람의 기억, 바다의 노래: 녹아내리는 경계에서 무해한 아름다움으로
바람의 기억, 바다의 노래: 녹아내리는 경계에서 무해한 아름다움으로
- 주소 (63267)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동문로14길 42 2층
전시명
《바람의 기억, 바다의 노래: 녹아내리는 경계에서 무해한 아름다움으로》
전시기간
2025년 10월 11일(토) – 11월 23일(토)
전시장소
마나 아트 갤러리 (Mana Art Gallery), 태국 방콕
참여작가
룩플리우 준풋사, 와팃 탕짜이(NET), 양화선, 박정근, 박지현, 성상은
전시소개
《바람의 기억, 바다의 노래》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자연환경, 문화적 상상력, 기후위기 대응의 감각적 실천을 아우르는 국제 전시 프로젝트이다. 제주와 방콕이라는 두 지역을 축으로, 국경을 넘는 예술적 연대와 무해한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본 전시는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과 도나 해러웨이의 생태철학을 사유의 기반으로 삼아, 인간과 비인간, 지역성과 지구성이 엮이는 복합적 관계의 감각적 맵을 제시한다.
<전시 서문>
바람의 기억, 바다의 노래: 녹아내리는 경계에서 무해한 아름다움으로
21세기의 인류는 단일한 주체로서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관계망의 일부로서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성찰해야 하는 전환점에 도달해 있다. 이는 단지 생태적 위기를 맞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위기의 본질은 ‘경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자각하는 데 있다. 자연과 인간, 지역과 세계, 살아 있는 것과 무생물, 기술과 감각—이 모든 이분법은 이제 해체되어야 하며, 새로운 존재 방식과 관계 방식이 요청되고 있다. 전시 《바람의 기억, 바다의 노래: 녹아내리는 경계에서 무해한 아름다움으로》는 바로 이 같은 문제의식 위에서 출발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기후위기’라는 보편적 의제와 ‘예술’이라는 감각적 매체를 통해, 국경을 넘어 공통의 책임과 감각을 나누는 실천적 장으로 기능한다. 제주와 방콕이라는 두 지역은 지리적, 문화적으로 이질적이지만,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몬순 기후대와 해양 순환의 일부로서 생태적 상호작용을 공유한다. 이 같은 생태적 연결은 단지 자연과학적 사실로만 읽히지 않는다. 전시는 이러한 상호의존성을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짜는 ‘관계의 그물망’이라는 시선에서 해석한다.
이러한 관점은 프랑스의 과학기술철학자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에서 이론적 실마리를 얻는다. 라투르는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단선적 위계가 아닌, 동등한 행위자(actant)로 얽혀 있는 네트워크의 일부라고 보았다. 인간은 더 이상 중심적 주체가 아니며, 바람, 해류, 식물, 데이터, 기술, 이미지까지도 각자의 방식으로 의미를 생성하고 전파하는 행위자로서, 세계를 함께 형성한다. 이러한 시각은 예술적 재현의 방식에도 중요한 전환을 요구한다. 바람과 바다는 이 전시에서 배경이 아니라, 의미를 생성하는 적극적 주체로 등장하며, 예술가는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고 감각화하는 중재자(mediator)의 역할을 수행한다.
한편, 미국의 과학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에서 기후위기를 비롯한 생태적‧정치적 난제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함께 머물고 살아가야 할 조건으로 본다. 그녀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공-생성(co-becoming)’의 사유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존재 간의 복합적인 공존 방식을 제안한다. 해러웨이에게 ‘트러블’은 회피하거나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감각하고 엮어내는 힘의 원천이다. 이 전시는 바로 이러한 ‘트러블에 함께 머무르기’의 태도를 예술적으로 구체화하는 실천이다. 예술은 위기의 조건을 단순히 고발하거나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 머물며 새로운 감각, 윤리, 행동의 가능성을 조율해 나가는 도구로 제안된다.
따라서 《바람의 기억, 바다의 노래》는 미학적 감상에 앞서, 하나의 이론적 실천이며, 동시에 윤리적 선언이다. 이 전시는 단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거나 향수를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해한 아름다움’이라는 부제는 예술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안하는 개념어로 기능한다. 이는 생태계를 훼손하거나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지 않는 감각적 재현, 다시 말해 생명 존중과 생태 회복의 실천으로서의 미학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예술은 그 자체로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하며, 나아가 상처 입은 세계를 감각적으로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한다.
《바람의 기억, 바다의 노래》는 예술가와 지역, 자연과 기술,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구성하는 복합적 장이다. 이곳에서 관람자는 더 이상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그 관계망의 또 다른 행위자가 된다. 관람자가 작품과 마주하는 순간, 전시는 완성되고, 하나의 네트워크가 동심원처럼 확장된다. 그것이 이 전시가 실천하고자 하는 기후정의(climate justice)의 감각적 실천이며, 예술이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는 방식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