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는 따가운 송곳처럼
잔디는 따가운 송곳처럼
- 주소 (63168)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58 Place1빌딩 지하1층, 돌담갤러리
- 홈페이지 www.minkyeongheo.com
<잔디는 따가운 송곳처럼>
- 작가 : 허민경
- 전시 : 개인전
- 기간 : 2024년 5월 18일 ~ 5월30일
- 시간 : 9시~18시(휴무없음)
- 장소 : 돌담갤러리
- 주소 : 제주시 중앙로 58, 지하1층
- 주관 : 제주문화예술재단
허민경 작가의 개인전 <잔디는 따가운 송곳처럼>은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를 가리기보다 망각된 것들을 찾아 나선다. 사건이 남긴 흔적을 되짚어가는 방식으로 답을 대신한다.
작가의 작업은 반복되는 재현 이미지에 가려진 여성들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4·3 이후 혼자 살아남아 수양딸이 되어야 했던 여성들의 삶을 좇아가며 그들이 견뎌낸 역경과 삶의 무게를 가늠한다. ‘진짜’ 가족의 죽음을 증명조차 할 수 없게 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펼쳐 보인 흑백 작업은 역사라는 큰길 대신 집으로 향하는 작은 골목인 올레를 따라 걷는 쪽을 택한다.
잔디는 몸을 찌르고 간지럽히며 잠긴 기억을 깨운다. 깊은 곳에서 떠오른 장면들이 마침내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곁에 선 이들에 의해 발견되어 좁지만 분명한 길을 낸다. ‘조용히 살라’는 염려와 애정 어린 당부의 말로 덮어 보려 하지만 길을 발견한 이들은 안다. 상처와 애씀의 흔적이 송곳처럼 버티고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끔함과 날카로움을 견디며 나아가리라는 것을.
기꺼이 잔디를 밟는다. 길을 따라나선다. 따가움을 견디고 마주하게 되는 것은 ‘피해자’, ‘희생자’라는 단어에 가려진 얼굴들이다. ‘질곡의 역사’라는 말로 손쉽게 정리되어 버린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면서도 뒤에 올 이들과 다음을 생각했던 여성들이다. 희생과 피해에 비통해하기보다 그들의 수고로움과 지난한 노력을 살핀다. 그러다 눈을 돌리면 새로운 길이 펼쳐진다. 그 위로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라는 말로 매듭지어져서는 안 될 장면들이 빼곡하다. 작품이 마지막으로 가리키는 곳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특정 지역을 넘어선 연대의 시도와 가능성을 찾는 우리의 모습이다.
서술되고 박제되지 않은 기억만이 전해질 수 있음을 주장하는 듯 전시실의 모든 작품이 어떠한 물리적 틀에도 갇히지 않고 가느다란 핀만으로 고정되어 있다. 뿌리내리지 못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기억들, 떠내려가는 이야기들을 담아낸 작품 앞에서 우리는 과거의 여성들과 끝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정체성을 구성해 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어쩐지 잔디를 닮아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끊임없이 따갑겠지만, 계속해서 상처받겠지만 다시 길을 나선다. 잔디의 지혜를 떠올리며 걷는다. 뿌리를 땅속으로 단단히 뻗어 내린다. 밟아 누르는 힘에 굴하지 않고, 비슷한 고통과 상처를 가진 이들의 손을 잡고 기어코 걸어간다. 옆을 늘려가며 나란히 함께 나아간다.
-독립큐레이터 이하영 비평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