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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적 풍경, 산과 바다 그리고 식물
:고순철의 ‘염생식물’에 대하여

만일 생명체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의 구성에 영향을 준다면, 대기는 더 이상 생명체가 존재하고 진화하는 단순한 환경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생명체 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쪽에 유기체가 있고 다른 한쪽에 환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에 의한 공동생산이 있을 뿐이다. - 부르노 라투르 지음, 박범순 옮김,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이음, 2021, 110-111

바닷가에 서식하는 식물을 그리는 고순철의 회화는 은근한 정서적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수평의 바다로 이어진 자연의 지형과 풀, 나무, 바위, 모래 등 풍경의 요소가 섬세한 표정으로 나타나는 그의 작품은 특정한 장소를 마주하는 느낌을 준다. 바다와 인접한 그림 속 그곳에는 검은 돌, 그 위의 흰 파도와 푸른 물결, 이들 너머에 보랏빛, 노란빛, 붉은빛, 초록빛 등 다양한 빛깔의 꽃들로 가득하다. 때로는 식물로 흐드러진 풍경이거나, 때로는 한 식물을 깊숙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들은 제주의 해안에 서식하는 식물을 기억하게 하는 현실의 실증적 기록이기도 한다. 특히 그가 그리는 바닷가 식물은 염분이 있는 토양에서 생장하고 소멸하는 염생식물(halophyte)이라 부른다. 즉 ‘바닷가 식물’ 또는 ‘갯가 식물’을 그리는 그의 회화는 제주 지역의 해안 식물지대가 주된 대상이 된다. 제주의 바닷가에는 해안사구와 염습지 등에 다양한 식생들이 자라나는데, 제주시 삼양동, 이호동, 구좌읍 김녕리, 월정리, 하도리, 애월읍 곽지리, 한림읍 협재리, 금릉리,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 표선면 표선리, 대정읍 하모리 등 해수욕장 인근에서 이 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식물이 그의 작업에 등장하게 된 가장 커다란 이유라면 그가 제주에서 나고 자란 일상이자 주변의 환경이라는 점이다. 그가 대상화한 모든 소재들은 오래전부터 그의 삶의 세계에 함께 해 온 것들이다. 즉, 작가는 그림 속 생명들과 함께 생태계의 공생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감각적이면서도 실증적인 층위들이 직조된 작가의 실존적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이렇듯 삶과 예술이 공통의 뿌리를 가지는 고순철의 작품은 그를 이루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폴리트 아돌프 텐(Hippolyte Adolphe Taine)은 프랑스 실증주의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어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를 둘러싼 ‘인종 la race(état physique de l'homme : son corps et sa place dans l'évolution biologique)’, ‘환경 le milieu (géographie, climat)’, ‘시대 le moment (état d'avancée intellectuelle de l'homme)’의 세 요소를 파악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역작 『영국 문학사 Histoire de la littérature anglaise』(4권, 1863~64) 서문에서 문학과 문화사 연구에 있어서 어떤 시대와 사회의 문화유산에도 동일한 원인력이 잠재해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는 작가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성격과 그의 사회적·정치적·지리적 배경 및 그의 역사적 상황, 즉 ‘인종’, ‘환경’ ‘시대’의 중요한 결정 요소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텐의 이 같은 주장은 작가 고순철의 이해를 위한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작가가 그려내는 대상이 곧 삶의 토대가 되는 환경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다 눈여겨보게 되는 텐의 ‘환경’은 영어로 environment로 번역되고 있으나 불어 le milieu과 이를 부연하는 두 단어 지리학(géographie), 기후(climat)의 영역을 지시한 의미로 직접적으로는 토양과 대기를 떠올릴 수 있다. 콩트(Isidore Marie Auguste François Xavier Comte)의 영향으로 실증주의적 연구 방법을 찾아낸 텐의 이같은 관점은 왜 예술가의 삶의 터전에 해당하는 모든 물리적,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개인과 집단의 역사적 조건이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울타리가 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게다가 ‘시대’의 le moment (état d'avancée intellectuelle de l'homme)를 생각해보면, 고순철 작가의 작업에서 장소를 발견하고 인지하며 곧 이를 재현하는 매 순간의 행위를 관통하고 있다. 제주도라는 환경은 그에게 지리적으로 경험되는 특수한 상황과 대기의 변화를 포함한 물리적 모든 조건으로서 자리하고, 장소를 마주하고 장면으로 이어지는 순간의 인식을 포함하여 작업화하는 과정이 텐의 주장을 상기하게 했다. 그만큼 그에게 제주도라는 특정한 장소성과 지정학적 위치를 포함한 생동하는 물질로서의 자연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2020년대, 염생식물의 시간 속에서

작가의 염생식물 작업들이 본격화된 2020년대는 땅채송화, 모래지치, 땅찔레꽃, 갯메꽃, 순비기, 황근, 갯까치수영, 갯기름방풍, 암대극, 갯완두, 갯무 등의 작품이 선보인다. 이처럼 염생식물을 보다 가까이 느낄 수 있게 그려낸 작업과 <해녀길>, <꽃에 물들다>, <스며들다>, <달의 정원>, <풍화>, <지나가다>, <얼키고 설키다> 등의 풍경의 작업 양 방향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작가에게 해녀 어머니에 대한 많은 사유는 어머니이 바당 가까이에 있는 식물을 그리면서 이루어진다. 어머니의 바당과 같지 않지만, 작가에게 제주의 해안가는 유년부터 이어진 유희의 정원이자 작업의 터전으로 새롭게 각인된 시기이기도 하다. 자연이 지닌 형태와 느낌을 확장시키면서 그의 작업은 노란 황근의 밝음과, 갯메꽃의 연보랏빛 미소 등이 한데 어우러진 것처럼 사실적이면서도 각각 식물의 개성을 강조하는 표현적 요소를 더하고 있다. <달의 정원>이나 <스며들다>와 같은 작품들은 그간 풍경을 통해 안정적 구도와 수평의 정서 위에 염생식물들이 자연스럽게 결합됨으로써 이전의 모든 대상과 표현이 어우러진 것으로 매우 완성도 높은 결과들이다.

“나의 작업에서 바닷가에서 뛰놀며 보았던 염생식물은 사람들이 눈에는 생태적인 중요성을 주목받지 못했던 잡초일 뿐이었다. 갯거시에 용암이 부글부글 끓다가 금방 굳어버린 검은 현무암의 돌과 모래땅의 가득한 풍경에서부터 어머니의 노동의 시간과 공간을 담아내려고 하였다.” -작가노트

고순철 작가의 작업은 당분간 이 염생식물들로 가득할 것이다. 그가 자신의 환경으로서 조명하였던 이들 식물은 물리적으로 기후 위기 시대 다시 눈여겨볼 대상으로 분류되어 또 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이 만나는 경계인 해안지대는 정서적 공간이자 현실적 대안의 장소이기도 하이다. 지구온난화, 해안 개발과 오염으로 사라지곤 했던 염생 식물지대는 탄소를 저장할 수 있는 ‘블루카본’의 장소로서 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이것이 어머니의 바다와 자신의 삶이 터전을 잘 지켜내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를 둘러싼 자연이 아니라 그가 일부인 바당과 하늘의 세계에서 그가 찾고 그려내는 식물은 다양한 표정으로 눈, 비, 해, 바람과 함께 생겨나고 소멸하기를 반복해 보여주며 우리의 삶의 시간에 공생을 위한 호흡을 멈추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의 초기시대부터 지속한 자연 풍경은 작금의 식물과 공존의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바다, 어머니, 그리고 타인들과 관계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2023.7
박남희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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